11. 칸반과 안전재고 — 재고가 재무제표를 갉아먹는 구조
재고가 현금을 묶어두는 구조, 칸반은 어떻게 푸는가
재고가 많으면 마음이 편하다는 게 현장의 오래된 착각이다. 안전재고를 넉넉히 쌓아두면 결품 걱정 없이 라인을 돌릴 수 있다는 논리인데 이 재고는 창고에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매달 회사의 현금을 붙잡아 두고 있다. 재고자산은 재무제표에서 유동자산으로 잡히지만 그 안에 들어간 현금은 이미 재료비와 가공비로 지출된 상태이며, 팔리기 전까지는 이익으로 전환되지 않는 돈이다.
칸반은 이 재고를 필요한 만큼만 흐르게 만드는 신호 시스템이다. 후공정이 부품을 가져간 만큼만 전공정이 생산을 시작하도록 카드나 용기 수량으로 생산 지시를 대신한다. 재고를 아예 없애자는 게 아니라, 변동을 흡수할 최소한의 안전재고 수준을 데이터로 정하고 그 이상은 만들지 않는 것이다. 안전재고 계산은 감이 아니라 일일 사용량의 편차와 조달 리드타임을 곱하는 방식으로 한다. 이렇게 현장 활동을 재고금액이라는 숫자로 옮겨보는 것이 이 시리즈가 처음부터 다뤄온 접근이다.
칸반 카드에는 아래 네 가지를 적어야 눈으로 보는 관리가 된다.
- 부품번호: 어떤 품목인지 식별하는 기준
- 로트 크기: 한 번에 생산·이동하는 수량
- 보관 위치: 정위치 관리를 위한 좌표
- 공급처: 조달 리드타임을 결정하는 협력사 정보

카드 수를 실제로 줄여나가는 것이 칸반 운영의 핵심이다. 다만 처음부터 최소 수준으로 줄이면 결품 리스크가 커지므로, 한 번에 10퍼센트씩 단계적으로 줄이면서 결품 여부를 관찰하는 쪽이 현장에서는 더 안정적이다.
안전재고 계산식과 협력사 비교
하루 평균 사용량 500개, 사용량 표준편차 50개, 협력사 조달 리드타임 3일인 부품을 놓고 보자. 리드타임 동안의 수요 편차를 고려해 안전계수 1.65를 적용하면 안전재고는 대략 50×1.65×루트3, 즉 143개 수준으로 계산된다. 그런데 실제 현장 재고를 확인해보니 2,000개가 쌓여 있었다면 필요량 대비 1,857개가 초과 재고다.
개당 원가가 8천원이라면 이 초과분에 묶인 현금만 1,485만원이다. 이 돈은 은행에 넣어두면 이자라도 붙지만, 창고에서는 보관비와 재고자산 감모 위험만 키운다.

- 협력사 A: 리드타임 3일, 안전재고 143개, 재고금액 114만원
- 협력사 B: 리드타임 7일, 안전재고 약 218개(50×1.65×루트7), 재고금액 174만원
같은 부품인데 조달 리드타임 하나로 재고금액이 이만큼 벌어진다. 단가가 협력사 B 쪽이 개당 300원 싸다고 해도, 리드타임 차이로 늘어난 안전재고에 묶이는 현금 60만원과 그 기회비용까지 따지면 실제로는 협력사 A가 총원가 관점에서 더 유리할 수 있다. 구매 단가만 보고 협력사를 결정하면 이런 재고비용이 누락되기 쉽다.
카드 수 조정에서 흔히 하는 실수
카드 수를 줄이는 기준을 결품 건수 하나에만 두는 게 현장에서 자주 나오는 실수다. 결품이 한 번도 없었다고 안전재고를 계속 낮추다 보면 협력사 쪽에서 갑자기 하루 납품이 밀리는 상황을 만났을 때 라인이 그대로 서버린다. 반대로 결품이 무서워서 카드를 늘리는 쪽으로만 조정하면 재고는 다시 예전 수준으로 돌아간다.
카드 수 조정 기준에는 결품 건수뿐 아니라 협력사 납기 준수율과 사용량 변동폭을 함께 넣는다. 셋 중 하나라도 기준을 벗어난 품목만 별도로 재검토하면 된다. 신규 부품이나 단종 예정 부품도 자주 빠뜨리는 대상인데, 사용량 데이터가 안정적이지 않아서 표준 공식대로 계산하면 오히려 과다 재고나 결품으로 이어지므로 초기에는 별도 관리 대상으로 분리해 수동으로 점검한다.
재고를 줄이는 활동을 보고할 때는 “재고를 얼마 줄였다”보다 “묶여 있던 현금을 얼마 풀었다“로 바꿔 말한다. 재무팀과 대화할 때도 이 표현이 더 정확하게 통한다. 칸반 도입 초기에는 결품이 늘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안전재고 기준을 낮추기 어려운데, 이때는 전체를 한 번에 줄이지 말고 사용량이 안정적인 품목부터 시범 적용해 결품률과 재고금액을 함께 추적한다.
시범 품목에서 석 달 정도 결품 없이 운영된 걸 확인한 뒤 나머지 품목으로 확대하면, 재고 절감액을 실적으로 제시하면서도 라인 정지라는 더 큰 리스크를 피할 수 있다.

카드를 회수하지 않고 부품을 먼저 가져가거나, 반대로 부품은 그대로 두고 카드만 먼저 반납하는 예외적인 처리가 반복되면 전산상 재고와 실제 재고 사이에 차이가 쌓인다. 차이가 커지면 안전재고 공식에 틀린 입력값이 들어가서 아무리 정교한 계산을 해도 결과는 신뢰할 수 없다. 월 1회 정도는 주요 품목을 대상으로 실사와 전산 재고를 맞춰보는 절차를 고정 일정으로 넣어두는 게 안전하다.
채찍효과도 안전재고 설계에서 놓치기 쉽다. 전공정에서 발생한 작은 수요 변동이 후공정으로 갈수록 폭이 커지는 현상으로, 완성차 업체의 주문이 하루 5퍼센트만 흔들려도 이를 그대로 반영해 협력사에 발주를 넣으면 부품 협력사 단에서는 변동폭이 훨씬 크게 증폭되어 나타난다. 증폭을 줄이려면 발주량을 그날그날의 요청 수량 그대로 넘기지 않고, 최근 며칠간의 평균과 완만한 변화율로 다듬어서 넘기는 평활화 과정이 필요하다. 칸반 카드 수를 재조정할 때도 최근 1주일치 급격한 변동만 보고 판단하지 말고 최소 4주 이상의 데이터로 추세를 확인한 뒤 조정해야 채찍효과에 휘둘리지 않는다.
칸반 운영을 고도화하는 법: 전자칸반, 밀크런, 등급관리
칸반을 종이 카드로 운영할지 전자칸반(e-kanban)으로 전환할지도 규모가 커지면 검토 대상이 된다. 종이 카드는 도입 비용이 거의 없고 현장에서 눈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협력사가 원거리에 있거나 부품 가짓수가 수백 개를 넘어가면 카드 분실이나 집계 오류가 잦아진다. 전자칸반은 바코드나 RFID로 소진 시점을 시스템에 실시간으로 넘겨 재고 데이터가 항상 최신 상태로 유지되고 발주 시점도 자동으로 계산된다. 다만 초기 구축비와 협력사와의 시스템 연동 작업이 필요하므로, 부품 가짓수가 많고 협력사가 여러 곳인 라인부터 우선 적용하는 것이 투자 대비 효과가 크다.
협력사별로 각자 원하는 시점에 개별 배송을 받으면 물류비는 분산되지만 입고 시점이 들쭉날쭉해서 안전재고를 더 크게 잡아야 한다. 밀크런 방식은 여러 협력사를 정해진 순서와 시간에 한 번에 순회하며 소량씩 자주 받아오는 물류로, 입고 주기가 짧고 예측 가능해지니 리드타임 자체가 줄어든다. 앞서 예로 든 부품에서 리드타임이 3일에서 1일로 줄면 안전재고는 50×1.65×루트1, 약 83개로 더 줄어들고 재고금액도 66만원 수준까지 내려간다. 밀크런 운영비가 추가로 들더라도 여러 협력사의 재고 절감분을 합치면 상쇄하고도 남는 경우가 많다.
재고회전율 지표와 함께 놓고 보면 칸반 개선의 효과가 더 명확해진다. 재고회전율은 매출원가를 평균 재고금액으로 나눈 값이며, 이 값이 낮다는 건 재고가 오래 쌓여 있다는 뜻이다. 칸반 도입으로 평균 재고금액이 줄면 분모가 작아지면서 회전율은 자연히 올라간다. 재무팀이나 경영진에게 개선 성과를 보고할 때 재고금액 절감액과 함께 회전율 개선 수치를 같이 제시하면, 현장 활동이 재무제표 지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한 번에 전달할 수 있다.
계절성이 있는 부품은 표준 안전재고 공식만으로는 대응이 어렵다. 성수기 직전 몇 주는 사용량 자체가 평소보다 크게 늘어나기 때문에, 이 기간만 별도로 안전계수를 높이거나 카드 수를 임시로 늘려주는 예외 규칙을 미리 정해둬야 한다. 이걸 정해두지 않으면 성수기마다 결품이 반복되고 담당자는 매번 “이번만 특별히” 재고를 늘리는 임기응변으로 대응하게 되며, 이런 예외가 쌓이면 칸반 시스템 자체의 신뢰도가 떨어진다.
부품별로 관리 수준을 똑같이 맞출 필요는 없다. 단가가 낮고 사용량이 안정적인 소모성 부품까지 정교한 안전재고 공식을 적용하는 건 관리 공수 낭비이므로, 이런 품목은 단순 최대·최소 재고 기준만 정해두고 눈으로 보는 관리로 충분하다. 반대로 단가가 높거나 리드타임이 길어서 재고금액에 미치는 영향이 큰 핵심 부품에는 앞서 설명한 통계적 안전재고 계산과 주간 단위 모니터링을 적용한다.
전체 부품을 금액과 관리 난이도 기준으로 등급을 나눠두면 한정된 관리 인력을 어디에 집중할지 판단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등급이 높은 핵심 부품부터 순서대로 칸반을 도입하면 초기 투입 인력으로도 재고금액 절감 효과의 대부분을 먼저 확보하고, 나머지 소모성 부품은 그 뒤에 시간을 두고 정리해도 전체 재고 절감 목표 달성에는 큰 지장이 없다.
제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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